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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벽화

명화 벽화제작- 계단 트릭아트 입체벽화 대구 애비뉴 8번가- 명화의 계단- 감각적인벽화-아이디어벽화

by 우주초미녀 2018.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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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젊은 감각과 고퀠리티를 추구하는 #고미아트센터 입니다.

대구 동성로에서 상가 #벽화작업을 완료했습니다~~(애비뉴8번가 - 명화의 계단벽화)

벽화제작

벽화로 제작하기 위해서는 현장 방문이 필수입니다~~!!

전 현장에 있으면서..

 그 현장 건물의 구조도를 꼼꼼히 따지고, 그 건물에 어울릴 그림을 생각하며, 아이디어를 냅니다.

이 건물은 6층까지 있는 건물이지만 계단이 세군데나 됩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당연 계단을 이용하겠죠?

이제 지루한 계단은 올라가지 맙시다~~~!!

 

대구 애비뉴8번가는 상가 전체의 계단을 이색적으로 꾸몄습니다.

명화의 계단을 제작하면서.. 일반적인 계단이 아닌 책 속의 그림이 벽에 살아 있듯이 ..

이젠 애비뉴8번가에 살아 있는 벽의 명화 세계에 빠져 봅시다~~

아름다운 명화 벽화를 감상하며, 계단을 오르다 보면 힘들다기 보다는 무엇 하나 더 얻어가는 듯한 느낌이죠~!^^


 

시공전 모습의 그냥 평범하고 심심했던 ~~~~ 

 

실내인테리어 명화벽화제작

짜잔 완성~~~~모네의 그림으로 명품 벽화가 완성 되었습니다.

 

실내인테리어벽화의 생감 짱좋아요

모네 대해서~~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다. 사람 냄새가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 평생 절경을 찾아 헤맨 화가가 있다. 아니 절경이라기보다는 진경이라 해야 옳을까. ‘인상파’라는 이름을 탄생시킨 클로드 모네(1840~1926)다.
   
   인상파를 ‘외광파’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스튜디오가 아닌 실외의 태양 빛에서 작업했기 때문인데, 모네만큼 일관성 있게 야외작업을 고집한 화가도 드물다. 모네는 원하는 풍경을 찾아 아르장퇴유, 베퇴유, 루앙, 에트르타, 지베르니 등 프랑스의 작은 마을은 물론 런던과 브뤼셀, 베네치아 등 타국의 도시들을 옮겨 다녔다. 그러다 1883년 4월 말 포플러나무가 아름다운 지베르니에 정착했다.
   
   지베르니는 파리 서북쪽으로 80㎞ 떨어진, 에프트강과 센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한 센 강둑의 조그만 동네였다. 지베르니에서 5㎞ 정도 가면 이웃동네 베르농이 있고 거기에 기차역이 있어 파리로 갈 수 있었다. 모네는 지베르니에 온 후로는 더 이상 거처를 옮겨 다니지 않았고 그 마을에 뿌리를 내렸다. 지베르니는 그를 자극해 일생의 가장 풍성한 수확물을 창조하게 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사실 쉰이 되기 전까지 모네는 아주 가난한 삶을 살았다. 마네와 같은 멋진 동료들의 지원으로 살았지만 언제나 빚쟁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렇지만 모네는 가난할 때도 제왕처럼 살았다. 이는 남들이 부러워할 호사취미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모네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라면 돈을 빌려서라도 여행을 했고 조그만 배를 구입하기도 했다. 그런 모네의 호사취미를 완벽하게 성취시켜준 곳이 지베르니의 정원이다. 그가 지베르니에 정착하게 된 것은 그림이 고가에 팔리기 시작하면서 생긴 경제적 여유 덕분이었다. 1890년 결국 세들어 살던 집을 사게 되었고 하인과 정원사를 고용하기에 이르렀다. 요리를 좋아했던 그는 값비싼 식탁을 구입했으며 자동차도 몇 대 구입했다.
   
   정원에 대한 모네의 관심은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래, 그리고 아르장퇴유와 베퇴유 시절을 거치는 동안 꾸준히 진화하였다. 그러다가 지베르니에 정착하면서 꽃밭과 수상정원을 꾸미는 데 흠뻑 빠져 그야말로 정원사가 되었다. 모네는 다섯 명의 정원사를 고용해 집에 딸린 과수원을 개조하고 강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포니즘(Japonism)에 매료되었던 그는 연못 중앙에 아치형의 일본식 다리를 놓아 연못을 건널 수 있게 만들었다. 특별히 파리의 예술품 중개상인 일본인 다마다 하야시로부터 수련을 구해 연못에 심었다. 1901년에는 근처에 있는 땅을 추가로 구입, 정원을 늘리면서 연못을 네 배로 확장했다. 그곳에 대나무, 사과나무, 살구나무 등 일본산 관목을 잔뜩 심었으며 온실을 만들기도 했다. 그후로도 지구촌 곳곳에서 사온 꽃나무들을 심어 식물의 종류를 하루가 다르게 늘려 나갔다. 원예잡지를 열렬히 구독하는 한편 백과사전과 전문서적을 통해 꽃에 대한 지식을 넓혀나갔다. 그가 스케치한 꽃의 종류와 원예가들에게 주문한 목록만 보아도 꽃에 대한 그의 열정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정원은 해가 갈수록 더욱 아름다워졌다. 진기하고 놀라운 색채효과를 내는 시간예술로서의 정원이 해마다 다른 빛깔로 완성되어 갔다.
   
   모네는 예전보다 드물어진 여행 중에도 지베르니를 잊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지베르니뿐이었다. 타지에서도 모네는 두 번째 부인이 된 알리스에게 정원의 상태를 꼼꼼히 묻는 편지를 보내곤 했다. “정원의 꽃들은 여전하오? 집에 돌아갔을 때 국화가 아직 피어 있었으면 좋겠소. 날이 차가워지면 꽃으로 멋진 부케를 만들어 보구려.”(1885년 11월 24일 에트르타에서) “당신에게 내 가엾은 장미꽃 얘길 듣고 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오. 다른 재난까지 덮칠까 심히 우려되오. 일본 작약에 덮개를 씌워 줄 생각쯤은 했겠지?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건 명백한 살상행위요. 내 온실을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오. 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기쁘겠소!”(1895년 3월 17일 산드비켄에서) 이처럼 모네는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원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은 적이 없을 만큼 정원에 열정적이었다.
 

 그렇다고 모네가 정원을 혼자만의 공간으로 여기고 즐겼던 것은 아니다. 그는 꽃이 피면 몸이 달았다. 빨리 정원의 꽃과 나무를 지인들에게 구경시켜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러곤 친구들에게 지베르니의 만발한 정원으로 놀러오라고 청하는 편지를 썼다. 조금만 늦으면 꽃이 다 시들어 버린다고, 언제 올 수 있는지 서둘러 와 달라고 아주 절실하게 요청했다. 그리고 방문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그들이 좋아하는 나무나 꽃을 한 바구니씩 부치기도 했다. 모네의 정원으로 초대받은 오랜 친구들은 언제나 기꺼이 정원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어떤 친구들은 그림을 가져와 모네와 교환하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꽃을 가져와 교환하기도 했다. 시인답게 스테판 말라르메는 애정 어린 시를 지어 보내기까지 했다. ‘꽃을 보러 오라’는 모네의 강렬한 메시지, ‘함께 꽃을 보자’는 전언만큼 강력한 에로스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늙어가고 있던 그에게 꽃피는 계절은 언제나 절정이며, 단 한 번뿐인 청춘인 셈이다. 그는 절정의 극치를 홀로 맛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베르니 생활에서 정점을 이룬 정원을 좋아하는 취향은 그대로 그의 작품에 반영되었다. 모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수련’ 연작이 그것이며 그는 ‘수련’을 250여점이나 제작했다. 그는 ‘수련’ 연작을 중심으로 한 풍경 그림으로 명성이 정점에 달하게 되는데, 1909년 ‘일상을 탈피한 전시회’라는 당시로선 조금은 기이한 제목의 개인전으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파리는 물론 브뤼셀, 런던, 베를린, 스톡홀름, 드레스덴, 그리고 미국의 도시에 이르기까지 모네의 작품들이 전시되기 시작했다. 그의 명성이 확고히 자리를 잡자, 동시에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스튜디오는 외국 방문객들이 다녀가는 성지로 변해갔다. 그중에는 일본인을 비롯해 수집가 세르게이 슈추킨 같은 러시아인, 존 싱어 사전트와 같은 미국 화가도 있었다. 모네의 옛 친구들(시슬레, 피사로, 모리조, 말라르메, 로댕, 르누아르, 세잔 등)과 가까운 지인들(제프루아, 미르보, 클레망소 등)은 물론이고 프랑스 내의 새로운 숭배자들(화가인 피에르 보나르와 자크 에밀 블랑슈, 출판업자인 폴 갈리마리, 공쿠르 아카데미 회원 등)들이 그곳을 다녀갔다. 여러 나라로부터 예술가들이 그를 방문하는 일이 잦아졌다. 뿐만 아니라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모네는 자신의 작업 장면은 물론 그가 소장한 화가의 작품들을 자세히 소개했다.
   
   모네의 성공의 핵심에는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담겨 있다. ‘건초더미’ ‘루앙대성당’ ‘국회의사당’ ‘수련’ 등 연작을 제작하는 일도 자연에 대한 애정과 겸손한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예컨대 모네는 평소 “한 번에 본 것을 그린다” 혹은 “다른 그림을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린다”는 모토를 세웠다. 동시에 그는 사랑하는 대상은 단박에 모두 담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해왔다. 따라서 한 번 본 것을 캔버스에 단번에 모두 옮길 수 없었기 때문에 동일한 장면을 그리고 또 그렸던 것이다.
   
   말년에 사랑하는 아내 알리스와 장남 장의 연이은 죽음으로 실의에 빠졌던 모네. 더군다나 화가로선 치명적인 백내장으로 시력이 점점 악화되었던 모네는 눈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도 지독하리만큼 작업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나쁜 시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원을 가꾸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쩌면 모네는 그림을 그릴 수 없을까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정원의 꽃들을 눈으로 어루만지지 못할 것이 더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모네가 헌신해 가꾼 집과 정원은 그의 예술작품 이상이 되었다. “내게 가장 절실한 것은 꽃이다. 항상 꽃이 내게는 필요하다.”


 

 

계단 벽면에 벽화시공이 들어가기전에 2틀전에 미리 하도를 칠해둔다.~~

 

계단 인테리어 벽화제작

오굳~~~~짱 멋찜!!

벽화

저 커다란 새가 그려진 작품의 제목이 "대가족"이라니... 

어쩌면 마그리트는 관람자들이 당혹해하는 것을 즐기려 했는지도 모른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의식과 지식에 대한 그의 이율배반과 역설은 많은 논란과 비판을 불러일으켰지만,

우리에게 이런 그림을 제시함으로서 저 새의 날개처럼 상상력의 나래를 한껏 펼치게 한 것도 사실이다.

계단입체착시명화벽화

정말 아름 다운 계단이 벽화로 완성 되었습니다~~

계단 하늘을 구름으로 잘라내서 자유의 새를 만들었네요~~~~

계단면 벽화 작업은 매우 까다롭습니다.

그 이유는 관람자가 보이는 시점을 잡기가 참 어렵기 때문입니다.

계단 벽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그 계단을 수십 번 오르고 내려서야.. 그때서야 정확한 시점이 잡힙니다.~~

 

명화 그림을 평범했던 계단에 이용하다니..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다이어트도 할수 있겠는 걸요~

계단오르기가 지겹지 않습니다~~~

또한 벽화로 포토존 형성!! 상가 홍보와 광고가 가능하답니다.

 

르네 마그리트에 대해서1898~1967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는 익숙한 우리의 감각을 뒤집고 관습을 거부하며 실제의 세계를 시험하기 위해 한 평생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창의성을 회화속에 표명함으로서 '어떤 불가능한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려 애썼다. 그리하여 화가라는 이름을 거부하며 자신은 다른 사람들이 음악이나 글로 생각을 나누듯이 회화를 통해 사람들과 생각을 교류하려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에게 회화란 현상세계를 넘어서는 '메타 리얼리티'를 불러일으키는 수단이자 존재의 평범함에 대항하는 영원한 반항정신의 전달체였다. 그럼에도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는 달리 비현실적이고 터무니 없는 대상 창조에 지나치게 탐닉한 적은 결코 없었다. 일상의 익숙한 오브제들에 자신의 '시적 아이디어'를 가미하여 '뭔가 익숙하지 않은 다른 것'을 만들어 내었다.

 

마그리트의 작품 세계에서 최초로 중요한 시기였던 1920년대 후반에 그는 영감처럼 떠오르는 수많은 관념에 사로잡혀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려 빠른 속도로 작업했다. 사실상 이후 작품에서 보이는 다양한 구성 요소와 부차적 이미지에 대한 주요 주제들이 이 시기에 형상화 되었다. 이 무렵의 대다수 작품들은 일상 세계의 요소들을 기발하게 재배치하여 고정관념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정신 상태를 뒤흔드는 시적 이미지로 가득 차 있었다.


1930년대는 예술가, 탐구가, 철학자로서 큰 성과를 이룬 시기였다. 그가 초기 작품에서 암시했던 여러 아이디어와
 문제의식들을 구체화시켰으며, 완전한 시각적 결실을 맺는데 성공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는 죽음에 대한 몰두가 그의 회화세계를 지배했다. '관' 시리즈의 작품들이 이 시대의 경향을 대변했다.  


1950년대에 들어서는
 여러 형태와 크기의 바위에 매혹되었다. 이 시대에 유명한 를 통해 바위의 무거움과 부동성에 대한 일반의 고정관념을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 '공중부양'의 개념으로 깨어버렸다. 그림 에서도 바위는 구름처럼 공중에 붕 뜨서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지 공간속에 일시 정지하고 있는지를 확신할 수 없게 했다. 이것은 400년간 지속된 뉴턴의 절대공간과 시간관을 뒤엎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과학관에 회화적으로 동조하는 격이 되었다.    

 

1960년대 초부터 사망한 67년까지는 현실과 환상의 이분법을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유리창과 이젤의 이미지를 계속 변용 실험했다. 에서 '그림 안의 그림'이라는 주제를 통해 '현실을 보는 창문'의 기능을 발휘하게 하여 숲의 외부와 내부 세계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면서 실재像과 그림像의 통합을 모색했다.

 

한편 주목받는 것을 싫어한 마그리트 자신의 특성은 말년 작품들에 자주 나타난 중절모를 쓴 남자의 익명성 속에 반영되었다. 이 남자는 배출할 길 없는 재능을 타고난 듯하지만 그 어떤 형이상학적인 고독감에 둘러쌓여 있는 분위기를 풍겨 철학하는 예술가로서 마그리트가 평생동안 부대낀 고달팠던 내면을 생생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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